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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1단계 AOS 3.6 깨어나기 -  모두가 사랑이에요!

* 소감문 작성 요령을 읽어보니, 마지막 경축식 때 앞에 나가서 대표로 말씀 하셨던 분들과 연습할 당시 조이투님께서 얘기 하셨던 내용과 같은 것 같아서 
그때 앞에 나가 여러분들께 말하듯, 이미 수련 내용은 다 알고 계시기에, 너무 좋았다 이런 얘기 쓰지 않고,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의 느낌을 위주로 써보았습니다! 물론... 주어진 시간은! 없습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1분 30초 안에 다 되기엔, 너무 많거든요 ㅎㅎ 


안녕하십니까 저는 416기 깨어나기 수련을 마친 사니 입니다 


10월 6일, 대전역을 향하는 기차 안에서 조차도 저는 가기 싫다며 모두에게 짜증난다는 소리를 했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돈이 아깝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냥 믿고 가보라는 어머니친구분의 말씀에도, 어머니께 돈이 아깝다고, 그 돈으로 차라리 내가 여행 혼자 가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걸 다녀오면, 그러면 달라질 거라고. 
엄마 마지막 부탁이라고. 
다녀오면 유럽여행을 보내주시겠다고, 그렇게 하셔서 제가 그냥 참고 간 것이었는데요. 

아마 예전 같았으면 저, 바득바득 우겨서 결국 안갔겠지만 - 유럽여행때문에 갔습니다 솔직히. 
저는 어머니와 싸우는 아이였습니다. 
어머니께 '혼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와 싸우는 아이였어요. 



저는 어머니와의 골도 깊었던 셈이지요. 
제 물음은 " 친아빠가 회사에서 지원금을 받고자 연락이 10년만에 온 것이 화가 날 일입니까" 였습니다. 
굳이 친아빠 라고 표현한 까닭은, 
제게 새 아버지가 계셨기 때문입니다. 

제 친아버지는 어머니와 제가 초등학교 입학도 하기 전 헤어지셨고, 
제가 친아버지에 대해 가지고 있는 유일한 기억은 초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어머니와 진짜로 이혼 도장을 찍기 전, 
어머니가 저를 업고 친아버지에게 새벽에 찾아가 소리를 지르며 싸우던 기억 -. 그리고 제게 딱 한번, 집 앞에 있는 음식점에서 돈까스를 사주신 적이 있습니다. 
똘똘이 인형도 사주셨었지요. 

그리고 저는 아버지를 본 기억이 없습니다. 

그 후 저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어머니의 재혼으로 이사를 가게됩니다. 
새아버지는 어린이 미술학원에서 원장님을 하셨던 어머니가 존경할만한 분이셨습니다. 
하지만 저와 성이 달랐고, 어머니와 나이차이가 14살이 나시는, 초등학교 2학년인 제가 보기엔 나이가 많으신, 다리를 절뚝거리시는 할아버지 같은 분이셨습니다. 
어머니가 재혼을 하시고 나서 항상 새아버지가 얼마나 존경스러운 분인지에 대해 제게 설명해 주셨지만, 어린 저는 하나도 와닿지 않았습니다. 
재혼을 하시고 한참동안 '교수님' 이라고 불렀습니다. 한달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제가 겨우 '아빠'라고 부르기 시작했을 무렵, 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지셨습니다. 
그것도 운동을 하시다가 정말 갑자기요. 
어린 저는 엄마가 집에 있으라고, 괜찮을 거라고 엄마만 응급실에 가셨고, 아빠가 아프지 않게 해주세요 기도를 했었습니다. 
 아버지는 뇌졸중이 재발하신 거라고 했습니다. 
왼손을 제외한 온몸이 마비되셨고, 말도 하시지 못했습니다. 한참을 중환자실에 입원해 계셨고, 그때부터 제가 초등학교 6학년이 될 때 까지, 계속 누워만 계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제 아버지의 죽음을 보았고, 장례식에 가서 '김현산' 이라고 바꾸어 자녀이름에 올라갔었습니다. 


그때의 저는 아버지가 싫었습니다. 
학교에서 가족관계조사서를 써오라고 하면, 나와 성씨가 다른 아버지가 창피했습니다. 나이가 많으신 것도, 거동이 불편하시고 말을 잘 못하셔서 잘 쓰지도 못하는 왼손으로 글씨를 힘겹게 써야만 하는 것이 
너무 싫었습니다. 
대소변을 다 어머니가 갈아주시고, 휠체어에 어머니가 옮겨주시고, 대학교수님이셨기에 학교에서 돈이 나온다치더라도 병원비로 다 들어가야 했습니다. 
병세가 심각해지시면, 입원을 하셨고 그때마다 전 늘 혼자 자야했습니다. 저는 외동이거든요. 
돈이 많이 들어가 어머니는 낮에는 간병인을 쓰시고, 밤에는 어머니가 간호하시며 4년을 보내셨고, 
저는 관심받고 싶고 사랑받고싶고, 칭찬받고 싶어서 애썼습니다.  
아버지가 쓰러지실 당시의 저는 학교가 끝나고 컴퓨터학원, 피아노학원, 보습학원, 미술학원 - 모든 학원을 다 다니고 집에 돌아오면 밤 10시. 
저는 정말 외로웠습니다. 무서웠습니다. 혼자 잠드는 것이 무서워 거실불을 키고 자고 , 사람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 무서워 TV를 켜놓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한참을 울고 나서야 잠이 들곤 했습니다. 
집에서 키우던 금붕어와 대화했고, 사랑받고싶어서 - 칭찬받고 싶어서 정말 애썼습니다. 


아버지가 일어나시지 못하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어머니도 점점 지쳐가셨습니다. 
허리디스크 마저 오시게되고, 계속된 병생활에 결국 집안에 병원 침대가 들어왔고 친구들마저 집에 데리고 오지 못하게 되자 저는 아버지가 정말, 정말 싫었습니다. 
진지를 드실 때 혼자 드시지 못해 매번 어머니가 도와드려야 하는 것도, 말을 못하셔서 저와 어머니를 부를 때는 손으로 소파를 퍽퍽 치시며 큰 소리를 내실 때에도 싫었습니다. 
어머니가 밤에 혼자 우시는 모습, 소변통을 갈고있는데 대변을 봐버리는 아버지에게 지치고 화가나서 주저앉아 울어버리시는 어머니를 볼 때, 
고모들이 올케로 인정해주지 않아 마음아파하실 때, 아버지의 친자식이라는 30살 언니와 20대 후반의 오빠가 아버지가 쓰러지신 이후 단 한번도 연락이 없을 때에는 
차라리 엄마와 둘이 사는게 더 행복할 것 같다, 아빠가 없는 것이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가 쓰러지신 다음날 찾아왔던 이후,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단 한번도 오지 않았던 아버지의 친자식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저희 어머니의 탓을 했습니다. 
그리고 저희 어머니가 유명한 화가셨던 아버지의 그림을 혹여나 팔아먹진 않을까 일일히 그림을 찍어갔습니다. 친자식이 아닌데, 저를 친자식으로 칠 수 없고, 재산도 줄 수 없다며 고모들과 함께 소송을 걸었습니다. 
어머니는 매일 우셨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정말 싫었습니다. 

그 이후, 저와 어머니는 둘이서 이모가 사시는 곳으로 이사를 갔고, 
제가 사춘기가 오면서 그동안의 모습과는 다른- 그런 제가 나타났습니다. 
친구들과 담배도 펴보고, 술도 마시고, 가출도 했습니다. 

어머니가 제게 이혼할 때 내가 너 데려가는 조건으로 재산 한푼도 안받았는데 왜 이렇게 속상하게 하냐는 말을 하실때마다 
이럴 거면 차라리 친아빠한테서 키워지는게 나았다고, 아니면 고아로 사는게 나을 거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더러운 일, 정신 상태가 이상한 사람이라면 해볼 법한 행동은 다 해본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 때에는 어머니께 죽고싶다고 칼을 들며 설치기도 했고, 
어머니와 싸운 날, 일기에다가 죽고싶다 아니면 엄마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썼습니다. 
내 말이 옳다, 어머니께 설명하려 들고 제 말을 어머니가 들어주지 않으시고 같은 말을 반복하시면 
그냥 귀를 닫고, 눈을 감고, 무시했습니다. 
그럴 때 어머니는 '이럴 때 보면 너 네 아빠랑 똑같애. 진짜 소름끼치게 싫다' 하셨고, 그것도 상처였습니다. 
친아버지는 아예 잊고 살았습니다. 

친구들과의 관계도 좋지 않았습니다. 
감정기복이 너무 심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불행하고, 제일 슬프기에 누구도 나를 이해할 수 없다 생각했습니다. 
자기가 조금 가정이 힘들다는 친구들도, 가만 보면 그냥 부모님이 이혼하시거나, 아니면 한분이 돌아가신 경우뿐이었습니다. 
나같은 가정사는 없었습니다.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한명도 없다고 생각했고, 
나이가 한살 한살 들 수록 더 심해졌었습니다. 
저보다 더 힘든 친구가 제게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았을 때, 겨우겨우 제 얘기를 털어놓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정말 친한친구, 믿었던 친구가 저와 관계가 틀어지고 나서 제 얘기를 안주거리 삼거나, 누군가 제 욕을 하는 것을 듣고 나면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세상이 무너지는 느낌 , ' 아 결국 사람은 다 똑같다, 믿으면 안된다. 그래봤자 나만 상처받을 뿐이다' 했습니다. 
누군가 저를 불쌍하게 볼까봐 자존감이 높은 척 우쭐댔습니다. 아버지 얘기가 나오면 천연덕 스럽게 거짓말 했습니다. 행복한 척을 하려고 애썼습니다. 

하지만 마음은 불안했던 걸까요? 
폭식증. 거식증. 도벽. 수면장애. 우울증. 강박증. 결벽증. 쇼핑중독.카페인중독. 탄수화물중독. SNS중독. 대인기피증. 허언증. 휴대폰 중독.... 

모든 정신장애는 다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의 깨어나기 이전의 삶을 말할 것 같으면, 정말 - . 그렇게 더럽고, 수치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세상의 더러운 일, 정신 상태가 이상한 사람이라면 해볼 법한 행동은 다 해본 것 같습니다. 
차마 부끄러워서 여태껏 한번도 고백해보지 못했지만, 
이제 정말 달라졌기에 - 과거라는 지나간 사실만이 남아있어 부끄럽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백합니다. 

  
깨어나기를 통해,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마음에 커다란 구멍이 난 아이였던 것입니다. 

구멍이 난 곳에 물을 부어봤자 뭐하겠습니까. 

그때는 몰랐습니다. 
제가 문제인지를 모르고 세상이 문제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친아버지가 21살때 연락이 오시고 나서도 저는, 한번 더 상처받았었습니다. 
10년 넘게 나를 찾지도 않아놓고, 그렇게 나는 어머니와 힘들었는데 20살도 아니고 21살이 되어서 이제야 날 찾아놓고, 
모르는 번호로 온 전화를 받으며 '누구세요' 라는 제 말에 '나 니 애비다' 라니. 
날 사랑하지도 않는, 내가 세상에 태어나는데에 유전자 말고는 준게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연락이 온 이유가 지원금이라니. 등록금이라도 내줄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세번째로 그런 연락이 왔을 때, 
어머니께서 가끔 제게 니 친아빠 모습이 보인다고 소름끼친다고 했을 때의 상처가 떠오르면서 내가 이런 사람의 딸이라는게 수치심이 느껴지고 
내가 더 싫어졌습니다. 

그리고 또 어머니께 했듯이, 
친아버지께도 상처를 드렸습니다. 

낳아만 놓는다고 부모가 아니라고. 아빠로 생각해본적 단한번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거라고. 
이제와서 아빠행세 하려 들지 마시라고. 여태 모르고 살았듯, 남보다 못한 사이니 차라리 평생 모르고 살자고. 

그렇게 보내놓고 아버지 대답은 듣지도 않은 채 차단해버렸습니다. 
아버지가 나를 이용하려고 연락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남자친구와 갈등이 있을 때, 누군가에게 상처 받을 때마다 의도는 없었어도 결국엔 우리엄마와 나를 힘들게 한 새아버지, 
나를 한번도 찾지 않아놓고 나를 지원금 때문에 찾은 아버지를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혼자 결론지었었습니다. 

'세상에 행복한 결혼은 없다' 
'세상의 남자들은 다 똑같다, 결국엔 다 나를 떠날 사람들이다' 

만남이 있던 순간부터 헤어짐을 생각하고, 이별을 생각하며 
덜 상처받기 위해 애썼습니다. 
자신이 마음을 덜 준 것은 생각지도 않고, 
최선을 다한 것은 생각지도 않고, 

누군가가 내게 나와의 관계가 힘이 들다고 호소하면 '결국 너도 똑같구나' 했고, 
가정이 평온하고 행복한 사람이 내게 위로하며 감싸려들면 '니가 뭘알아' 했습니다. 

결혼은 해서는 안되는 것이며, 
아이를 낳으면 여자 몸만 망가지고, 남자들은 바람을 피기에, 여자손해이다- 생각했습니다. 

깨어나고 나서는 제가 어떻게 바뀐 줄 아십니까? 


어제   그동안 대학을 다니면서 어머니가 주시는 용돈으로는 충족이 되지않아 아르바이트를 했던 사장님께 찾아갔습니다. 
그것이 어제 제가 정한 해야하는 일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림도구에, 책에, 노트북까지 저는 짐이 정말 많았습니다. 
무슨 짐이 그렇게 많냐고 하셔서 공부를 하다가 와서 그렇습니다 제가 공부가 하고싶어져서요 욕심이 많다보니 짐도 많습니다 라고 했는데 말하면서 저도 쑥쓰러워 엄청 웃었습니다. 
그런데 사장님이 저보다 더 웃으시면서 " 얘 뭐래니 공부는 학생 때 하는거야" 하셨습니다. 예전같았으면 전 고집이 세고 자기주장을 꼭 해야 화가 풀리고. 그게 맞다고 저보다 훨씬 더 크신, 먼저 세상을 사신 사장님을 가르치려 들었을 겁니다. 
근데 속으로 이게 화가 날 일인가 물었고, 사장님이 하신 말씀도 맞다는 걸 알았습니다. 
공부는 학생 때 해야합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저도 말했습니다. 웃으면서요 !  "맞아요 ! 그런데 제가 마음이 하고싶어져서요. 이제라도 좀 바꿔보려고요! 평생 공부시대 아니겠습니까!! " 
그러니까 더 웃으시면서 사장님이 그러시는거에요. 
" 얘 거기갔다오더니 좀 이상해졌다~ 안그러냐?" 
다른 아르바이트생 동료들에게 물으셨고, 곧 이어서 
"오늘 주무시는 밤 따뜻하시겠쎄여~집에 옥장판이 가득하시져?!? 엄~~청 따뜻하시겠네여~~" 

그때 또 알았습니다. 첫째주, 둘째주 주간 수련 메뉴얼에서 하신 말씀이요. 내가 지금 행복하다는 것도 비밀이라구요. 
그렇지요 보지않고 경험하지 않은 세계는 모를 것이고, 아마 저였어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더군요. 

그런데 자꾸 웃음이 납니다. 

살면서, 이제껏 살아있어서 행복하다고 느낀 것이 처음이고, 
어머니와 하루 종일 사랑한다는 말과 사랑스러운 말들로 대화를 이어나가며 어머니께 자랑스러운 딸인 것이 처음이고, 
이렇게 제 자신이 좋고 뿌듯할 수가 없습니다. 


다, 하비람 선생님들 덕분입니다. 
공부가 하고싶습니다. 
시간이 모자랍니다. 

예전에 이미 받아두었던 영어 잘하는 법 강의를 이제야 듣습니다. 
음악을 들으며 하루에 한끼도 먹지않고 , 무리해가며 했던 다이어트. 
남들 눈에 예뻐보이기 위해 했던 운동을 

이제는 나를 위해, 건강하고자 합니다. 
그것도 시간이 아까워서 강의를 들으면서 합니다. 
시간을 계속 체크하면서 체크리스트를 점검합니다. 
이런 내가 좋다며 웃음이 계속 납니다. 
가슴이 너무 벅찹니다. 

겉이 중요한게 아니란 걸 깨닫고 나니, 
식욕억제제를 먹어도 자제가 되지 않던 식욕이, 
배가 부르면 그만 먹게되고 - 

먹고싶어도 '살을 빼려면 참아야해' 하면서 스트레스 받았던 
내가 좋아하는 군것질을 

이거 하나정돈 먹어도 괜찮아 하면서 
그냥 사먹으며, 한입 먹고 남깁니다. 그만 먹고 싶어져서요. 

정리정돈 안하고 , 어지럽혀져 거의 쓰레기장 같던 제 방도 치웁니다. 
신발은 신발장에- 설거지는 밥을 먹고 바로.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예전 같았으면 길바닥에 버렸을 쓰레기들을, 
이제는 쓰레기통이 보일 때 까지 들고 다닙니다. 

가게 아주머니부터 버스기사아저씨, 택시기사 아저씨, 그냥 만나는 분들께 항상 인사를 합니다. 
어르신들이 칭찬을 해주십니다. 
해달라고도 안했는데, 커피를 사이즈업을 해주십니다. 
하루에 10잔이 넘게 먹던 아메리카노도 하루에 1잔 이상 먹지 않게 되었습니다. 

살면서 초등학교 때 이후로는 단 한번도 1년 내내 매일매일 꽉 채워 12월까지 다이어리를 완벽하게 다 써본 기억이 없습니다. 
늘 노트도 끝까지 다 쓰기전에 새것을 샀습니다. 
집에 비슷한 것이 있어도 또 사고, 또 사고, 또 먹고, 또 먹고. 


제 안에 구멍이 있어서 그랬던 것이었습니다. 
이제라도 알게되어 너무기쁩니다. 

매주 어머니와 일요일마다 목욕탕을 다니기로하고, 
한달에 한편씩 영화를 보기로 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전화를 드리고, 

일주일에 한통 할까말까하던 어머니와의 통화를 하루에도 여러번 합니다. 
결혼도 하고싶어졌습니다. 
결혼에 대한 제 생각은 생각일 뿐, 
남자에 대한 생각도 생각일 뿐. 

사실이 아니기에 . 
내가 나를 정말 사랑하기에 남을 더 사랑 할 자신이 있습니다. 
상처받지않으려 표현하지않던 버릇도 버립니다. 
그건 부끄러운 것이 아니기에, 모두에게 사랑한다 말하고 표현합니다. 
누가 내가 좋다하면 왜 좋지?의심부터 했지만, 이젠 그냥 믿습니다. 
제가 행복하기에 세상이 달리 보입니다. 
내 아이들의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되고싶어 나쁜버릇들이 다 사라졌고, 아이도 넷이나 낳고싶어졌습니다. 능력이 된다면 더 낳으면 더 좋겠네요 ㅎㅎ 


무엇보다. 더이상 '친아빠' 라는 말이 안나옵니다. 
아버지는 그냥 아버지입니다. 저는 제가 노현산인게 좋습니다. 
예전엔 아빠가 둘인게 너무 싫었는데 
이젠 앞마당님도. 아부지시니 셋이지요? 
사랑하는 아빠가 셋이라니. 저처럼 행복한 아이가 없습니다. 
아버지를 용서했고, 아버지께 무례했던 제 무지식을 뉘우쳤고, 
조만간 찾아뵈어 말씀드릴것입니다. 두 눈을 보면서요. 

삶이 행복이고 모두가 사랑입니다. 
나만 달라졌는데 세상도 달라졌습니다. 
사실 세상은 처음부터 지금 모습 그대로였는데 말이죠... 

정말 고맙습니다. 
특히 가이아님, 

우주가 보낸 사람이라서- 정말 큰 사람이 될거라 힘든일이 많았던 거라는 말씀. 
그 말씀 때문에 제 꿈도 크게 가질 수 있었습니다. 

꼭 이루고 맙니다. 
정말 꼭 이루겠습니다. 

그래서 저보다 더 힘들고, 더 아픈 사람들. 
혹은 저처럼 '내가 세상에서 제일 힘들어' 라는 생각 속에서 허우적 대며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힘이 되고 싶습니다. 


'사람은 절대 변하지 않아' 라는 건 네 생각일 뿐이라고. 

사람은 변한다고, 보여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보여드리겠습니다. 


오늘도, 살아있게 해주셔서 
하루를 꽉 채워 살게 해주셔서, 

감사히도 하고 싶은 것, 해야할 일이 정말 많습니다. 

더 열심히 살겠습니다.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게 살겠습니다. 

정말정말,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그동안 저의 잘못, 용서해주십시요. 

뉘우치며, 숙이며, 예- 하고 혀- 하겠습니다. 

"아! 숨채이오! " 
평생 함께 해요 우리 ♥ 



-2016.10.11 새로 태어난 날 이틀째 밤, 오늘 할일을 다 마치며, 사니올림 - 



         http://blog.naver.com/onisani 
                           제 블로그 놀러오셔요! '그리는, 사니' 라는 폴더와 '그림일기-사니', '오더드로잉' 이라는 폴더에 
                           저의 그림들이 있습니다. 

         Instagram ID : sani_hanappu 검색하시면 그림을 더 많이 보실 수 있습니다. 

                                                                     !!!!!!!!!!!!!!!!!!!저는 꼭, 제 그림으로 세계적인 거장이 되어, 우리나라를 빛내고 말 것입니다!!!!!

키워드 : 일반

작성자 : ALP센터 | 작성일: 2016-10-27 | 조회수: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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